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 .

일거리 없이 2년을 지내다 보니 에너지를 쏟지 못해 그런지 갑갑해서 집안에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툭하면 밖으로 나갔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내 또래의 남자들이 바글바글했다.

산에 갔더니 평일인데도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공원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 대열에 끼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막노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막노동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미군 부대에서 막노동 반장을 하는 친구를 만났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 같은 샌님을 데려다 쓰면 골치 아프다는 이유였다.

만일 사고라도 나면 친구들이 자기를 ‘나쁜 놈’이라고 할 텐데 자기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진짜 속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물러섰다.

또 다른 놈을 만났는데 공사장의 안전 깃발을 드는 일을 시켜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 신정동 네거리에 있는 교육장에서 오전 내내 교육을 받았다.

주로 안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 열 명쯤 남짓한 교육생들은 대부분 젊었다.

>

중간 휴식 시간에 만난 동갑내기는 막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나이였다.

건설 현장에서 안전을 강조하다 보니 이수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손을 본 그는 한심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왔다.

“형씨, 그 손으로 막노동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보아하니 사무직만 하신 양반 같은데.” 그냥 웃어주기만 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야 되겠는가. 못할 건 또 뭐냐? 그 무더운 여름날 내 발로 걸어가 안전교육 이수증을 받으려고 했던 이유는 갑갑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무슨 떼돈을 벌 수도 없고 고향에 내려가 친구 밑에서 깃발로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는 일을 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거실에 앉아 종일 tv를 보는 것보다야 가성비가 있지 않은가.​내가 일자리를 부탁했던 고향의 두 친구만 나의 막노동 도전에 고개를 저었던 것은 아니다.

아내와 두 딸, 모든 친구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그냥저냥 살아도 되는 놈이, 그것도 미국에서도 잘 지냈던 놈이 체면이고 위신이고 팽개쳐가며 일당 십만 원짜리 막노동을 하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인력 시장을 하는 고등학교 동창은 내가 처한 현실을 깨우쳐주려고 다육 재배 농장까지 데려가 주었다.

다육 농장에서도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차라리 외국인을 쓰지 당신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늙은 한국인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처참한 말을 들었지만 지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박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은 내게 훈장이나 마찬가지다.

국가에 공을 세우지 못해 그 흔한 훈장 하나 없이 살다가 인생 말년에 얻었다.

얼마 전 우연히 장롱에서 발견된 이수증을 보자니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당시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기억에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간절하게 일하기를 원했는지. 삶에 대한 열정을 무언가에 쏟고 싶어 그랬던 것일까.​이수증을 받자마자 고향에 내려가 막노동판에 뛰어들 줄 알았지만 막상 받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이수증을 받고자 했던 이유는 그걸 들고 막노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중에 품었던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 하는 일에 짜증 나서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이수증을 꺼내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